G와 언쟁을 한 후, 그가 나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 뒤부터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유난히 조심스러워졌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G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너를 알게 되고 인연이 된 게 신기하고,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나를 이성적으로 본다는 말은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워.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직접 만난 적도 없잖아.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게 나로선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러자 G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난 네가 마음에 들고, 대화도 잘 통한다고 생각해.”
“뭐라고? 우리가 언쟁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런 것만 봐도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지 않아?”
“그래, 하지만 그건 앞으로 바꾸면 되는 거야.”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난 정말 너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어.”
“좋아, 그럼 지금부터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 보자.”
언쟁했던 때와는 달리 G는 차분했고, 나에게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G와 연락을 이어나가 보기로 했다.
G는 자신의 일상을 공유했고, 나와 많은 대화를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누구든 진심을 알 수 없으니까.
조금은 경계하면서도, 조금은 진지하게 G를 알아가보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남사친, 여사친’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처음 언쟁 이후 나는 딱히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도 않았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누군가와의 만남을 공유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G와의 대화가 비교적 평화롭게 이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G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G처럼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과 그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G의 감정이 진심이든 로맨스 스캠이든, 그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괜한 여지를 주는 듯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남사친, 여사친’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이번엔 확실하게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 물론 G가 처음처럼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만 대응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G, 이야기 시작 전에 약속해줘. 지난번처럼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겠다고.”
“당연하지. 차분히 이야기해보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넌 여전히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이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돼.”
“그래,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그런데 너, 곧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싶다고 했잖아?”
“응. 맞아.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한국엔 회식 문화가 있어.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식사하고, 때로는 술도 마시고 시간을 보내는 문화지. 새로운 직원이 오면 환영 회식을 하기도 하고, 그런 자리에 네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어.”
“그래서?”
“너도 그런 자리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거야.”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런 자리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할 거야.”
“불가능한 요청은 아니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거야.”
“난 네가 진짜 여사친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하지만 누군가의 인연을 니 기준에 맞춰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넌 나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근데 나는 내 소중한 인연을, 그것도 아무 문제 없는 관계를 타인의 기준으로 끊고 싶지 않아. 물론 너와 내가 깊은 인연으로 이어질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왜 네 인생에 남자가 필요한 거야?”
“남자? 난 친구 얘기를 하는 거야.”
“남자는 남자일 뿐이야.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나는 끝까지 차분하게 이야기하려 했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G와 친구로 지낼 수도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G의 생각은 단단했고, 어떤 타협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더 이상 이 문제로 얘기하진 말자. 그리고 니 논리대로라면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없으니까, 이쯤에서 연락은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뭐라고? 그건 네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뭘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건데?”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
“내가 너한테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한 적 있었나?”
“그게 그 말이야!”
“나는 단지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서 다시 이야기해본 거야. 하지만 지금 보니 안 되는 일이란 걸 알겠어. 그러니까 연락을 그만하자는 거야.”
“넌 정말 이기적이야.”
“내가 왜 이기적이야?”
“넌 너만 생각하잖아.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남자를 만나려고 해?”
“니가 뭔데? 내가 왜 네 말에 맞춰야 하는 거야?”
“우린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알아가는 사이잖아.”
“그게 잘못된 출발이야. 나는 너를 친구로 알아가고 있었어. 친구로서도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이성적으로 먼저 생각할 수 있겠어?”
“내가 너에게 좋은 감정이 있다고 말했잖아.”
“응. 하지만 나도 너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 적은 없어.”
“그래서 넌 결국 남자를 선택하겠다는 거지?”
“남자가 아니라 친구. 난 남사친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있는 몇 명은 10년 넘게 알고 지낸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야. 앞으로 우리가 연락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이런 부분은 확실히 하고 가고 싶었어.”
“니가 날 사랑하게 된다면, 너에겐 단 한 명의 남자만 있어야 해.”
“우리가 연락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말을 해? 난 그냥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 남자들은 절대 친구가 아니야. 남자는 다 그래.”
“그래. 알겠어.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도 여기까지 하자.”
“남자가 그렇게 좋아?”
그 말에 꾹꾹 눌러 참고 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마치 남자에 미친 사람처럼 몰아가며, 내 소중한 친구들을 욕하는 그의 태도에 더는 예의나 존중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와우, 넌 남자랑 친구가 어떤 의미인지도 구분 못하네. 내가 왜 이런 얘기로 시간 낭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난 남자든 여자든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니가 내 친구들을 모욕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그들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야. 이제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만하자.”
“넌 지금 나한테 큰 상처를 주는 거야.”
“넌 나와 내 친구들을 모욕했어, 이것도 상처라면 상처야 그러니 상처받는 건 네 몫이야.”
정말 너무 답답했고, 화가 났다. G와 어떻게 잘 해보자는 생각은 없었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었기에 이런 예민한 주제를 이야기해본 것뿐이었다. 그런데 진짜 독일에 사는지도 모를 이 사람이 나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게 너무 불쾌했다.
“너 진짜 나쁜 여자구나.”
“그래, 너 말이 다 맞으니까 나는 나쁜 여자가 되겠지.”
“계속 이럴 거야?”
“아니, 이제 너랑 얘기할 일 없어.”
“꼭 그래야겠어?”
“니 말대로라면 우리 친구도 될 수 없잖아. 그리고 난 너처럼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이랑 어떤 관계도 만들고 싶지 않아.”
“결국 너는 내가 아닌 남자를 선택하는 거네?”
“아니. 난 누구도 선택하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자.”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G는 계속해서 나를 붙잡으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 진절머리가 나서 막말도 섞이게 됐다. 그 끝에 G는 마지막으로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bad girl”
이 이야기는 한동안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줏거리가 되었고, G는 자연스럽게 **‘독일에 사는 그놈’**으로 불리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G와 연락을 시작한 지 단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느꼈다. 언어 교환도,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도,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선 단순한 관심이나 대화 그 이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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