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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반대편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시작된 사랑_EP2. 독일에 사는 그리스 남자와의 싸움.

by farhi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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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언어 교환 앱을 시작했을 때,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긴 했지만, 정작 언어 교환은 뒷전이고 만나자는 이야기부터 꺼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레 경계심이 생겼고, 이후로는 누가 말을 걸어도 선뜻 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앱의 거리 기능을 보고 그래도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인이라면 가볍에 이야기 해보는 것은 괜찮겠지?’라는 마음이 들었고, 마치 내게 선택권이 생긴 듯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을 둘러보고, 대화도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 거주 중인 한 그리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곧 한국으로 올 예정이라고 했고,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에서 일을 하며 정착할 계획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독일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온라인으로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다앞으로 이 이야기에 등장할 그는 ‘G’라고 부르려 한다.

 

언어 교환을 하고 싶었던 마음은 분명했지만, 막상 나의 실력으로는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거의 모든 대화를 파파고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어 교환'은 어느새 '그냥 친구 만들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외국인 친구가 생긴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름대로는 재미있었다. G와는 종종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가 한국의 메신저인 카카오톡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카카오톡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자주,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꽤 크게 다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이지만, 당시에는 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G는 점점 나를 여자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오해이겠거니 생각하며, 그의 애정 표현 같은 말들을 그냥 흘려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남사친과 여사친에 대한 의견 차이로 격한 언쟁이 벌어졌다. 그날 나는 평소처럼 퇴근 후 친구를 만난다고 했고, G는 대뜸 누구를 만나느냐, 남자냐 여자냐 묻기 시작했다. 남자도 있다는 말에 그는 갑자기 분노하기 시작했고, 마치 내가 그의 연인인 양 따져 묻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여자친구도 아닌데 말이다지금 돌아보면 참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장면이다.

 

그때 나는 단순히 G 남사친과 여사친에 대해 다소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흔히 논쟁이 되는 주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 적도,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가 다소 격하게 반응했을 때도 그저 조금 예민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나는 내 생각을 차분히 전달했다.

남녀 간에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몇몇 오랜 친구인 남사친들이 있고,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없었다. 나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였을까. G는 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파파고에 돌려가며 읽고, 번역이 이상한 부분은 다시 유추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신이 없었다. 말이 점점 격해지고, 나는 점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뭔데 내 친구를 만나지 말라고 하느냐. 그 친구들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고, 아무 문제도 없었어. 너는 너의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내 인간관계에 대해 간섭할 권리는 없어.”

 

그러자 G 실망했다는 말과 함께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단둘이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함께 있어도 남녀가 식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나를 강하게 비난했다그날의 대화는 충격과 당혹, 그리고 피로함으로 가득한 하루로 남았다.

 

나는 누군가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 의견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시선과 가치관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G가 나의 생각에 이렇게까지 분노하고, 점점 비난조로 말을 이어갈수록 나 역시 참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인도 아니었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는 이렇게 집요하게 나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G에게 말했다.

 

나는 네 여자친구도 아니고, 지금 이건 그저 생각의 차이일 뿐이야. 남사친이든 여사친이든,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게다가 설령 그런 친구가 없다 하더라도, 직장에는 이성 동료들도 있고 가끔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경우도 있어. 너 역시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아?”

 

그러자 G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는 그런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않아.”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나는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게까지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생각이 다르고, 게다가 넌 내 남자친구도 아니야. 그런 네가 나에게 누구를 만나지 말라느니,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건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만약 G가 계속해서 나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이 관계는 여기까지라는 결심이 들었다.

G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화해왔어.”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 우리 사이에 그런 기류가 있었던 걸까?

그가 가끔 던지던 애정 섞인 말들이 신호였나?

내가 그 신호를 받아들인 걸로 보였던 걸까?

혹시 나도 모르게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했던 걸까?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나는 단지 외국인 친구에 대한 호기심으로 G와의 대화를 즐겼을 뿐이었다. G의 다정한 표현들이 낯설긴 했지만,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인이라 그런 표현에 익숙하고, 친근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여겼다.그래서 G의 말이나 행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한 번도 분명한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나는 너와 단순한 인연이 아닌,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어.”

그 어떤 말도, 어떤 뉘앙스도 명확하게 전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성적인 감정으로 다가왔다는 그의 말 앞에, 나는 그저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G에게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G, 네가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너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 만약 내가 너에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그리고 너의 가치관을 보아하니, 우리 둘은 친구로 지내기엔 맞지 않는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메시지를 확인한 G는 잠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했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아. 미안해. 침착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해볼게.”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G는 여전히 연락을 이어가고 싶다고 했고, 여러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일단은 연락을 유지해보기로 했다.

 

그날, 긴 대화를 마치고 나니 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너무 웃긴 상황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일에 사는 남자와 남사친·여사친을 두고 언쟁을 벌이고, 이성적 감정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 그 순간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신선한 경험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많은 걸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관계라는 것,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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